8월 고추는 언제 붉어질까|수확부터 태양초 말리기까지 텃밭 이야기
8월의 텃밭에 나가면 요즘 가장 먼저 고추밭부터 들여다본다. 초여름에 심었던 모종은 어느새 허리춤을 훌쩍 넘었고 가지마다 고추가 조랑조랑 달렸다. 그런데 초록 고추는 많은데 빨갛게 익은 고추는 아직 손에 꼽힌다.
물을 주고 쓰러진 가지를 묶어 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밭을 오가지만, 고추가 붉어지는 속도만큼은 내가 재촉할 수가 없다. 어제까지 초록이던 고추 끝에 붉은 기가 돌기 시작하면 반갑다가도, 완전히 익으려면 또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
몇 해 텃밭을 가꾸면서 이제는 안다. 8월 고추밭에서 필요한 것은 많이 손대는 것보다 잘 살피고 제때 수확하는 일이라는 것을. 오늘은 초록 고추가 붉어지는 과정부터 첫 수확, 햇볕에 말리는 과정과 8월에 특히 조심해야 할 병해까지 내가 고추밭에서 겪은 이야기를 함께 적어 본다.
초록 고추는 왜 이렇게 천천히 붉어질까
고추는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힌 뒤 한동안 초록색으로 몸집을 키운다. 충분히 성숙하면 품종에 따라 초록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밭에서는 이 변화가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같은 포기에서도 빨갛게 익은 고추와 이제 막 색이 변하기 시작한 고추, 아직 짙은 초록색인 고추가 함께 달려 있다.
요즘 우리 밭이 꼭 그렇다. 아침마다 들여다보면 어제까지 초록이었던 고추 한쪽에 붉은빛이 번져 있다. 며칠 뒤에는 그 붉은색이 열매 전체로 조금씩 퍼진다.
처음 고추를 키울 때는 이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조금만 붉어져도 얼른 따고 싶었다. 하지만 고춧가루용 홍고추라면 충분히 붉게 착색되고 열매 상태가 좋은 것을 골라 수확하는 편이 낫다. 반대로 풋고추로 먹을 것은 초록색일 때 필요한 만큼 따면 된다.
무엇보다 8월에는 고추를 빨리 붉게 만들겠다며 물이나 비료를 갑자기 늘리는 것보다 현재 달린 열매와 잎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먼저다. 폭염이 이어지는 날에는 흙의 마름 정도를 확인하고 물을 주고, 열매가 너무 빽빽하게 숨어 있다면 병든 잎이나 불필요한 부분을 정리해 통풍을 돕는다.
나는 이제 고추가 빨리 붉어지지 않는다고 조급해하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의 색을 비교해 보는 것도 8월 텃밭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재미이기 때문이다.
첫 붉은 고추를 수확하고 알게 된 것
8월에 들어서면서 드디어 온전히 붉어진 고추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손으로 만져 보니 열매는 단단했고 색도 제법 짙었다. 몇 개 되지 않았지만 첫 붉은 고추를 따는 마음은 생각보다 컸다.
봄에 작은 모종을 심고 장마를 지나 폭염까지 버틴 결과가 손바닥 위에 놓였기 때문이다. 장마에 줄기가 기울면 다시 묶어 주고, 더운 날에는 흙이 얼마나 말랐는지 살폈다. 그러니 고추 한 개도 마트에서 사는 것과는 다르게 보인다.
수확할 때는 붉은색만 볼 것이 아니라 열매 상태도 함께 살펴본다. 표면이 깨끗하고 단단한 고추는 따로 모으고, 물러지거나 움푹 팬 부분, 검게 변한 반점 등이 있는 고추는 정상 고추와 분리한다. 특히 비가 잦고 습한 시기에는 병든 열매를 그대로 두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또 고추를 손으로 거칠게 잡아당기면 가지가 함께 꺾일 수 있다. 나는 가능하면 꼭지 부분을 살피며 조심해서 따거나 가위를 이용한다. 한 번에 모두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잘 익은 것부터 여러 차례 나누어 따는 것도 텃밭 고추 농사의 특징이다.
첫 수확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소쿠리에 붉은 고추 몇 개를 담아 놓고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넉넉해졌다. 양보다 기다린 시간이 먼저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태양초 말리기, 햇볕만 좋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붉은 고추가 늘어나면 다음은 말리는 일이다. 올해도 수확한 고추를 손질해 햇볕에 말려 보기로 했다. 마당에 고추가 펼쳐지기 시작하면 우리 집 풍경도 어느새 늦여름으로 바뀐다.
직접 해보니 고추를 햇볕에 말리는 일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간다. 아침에 내놓았다가 날씨가 흐려지거나 비가 올 것 같으면 다시 거둬야 한다. 한쪽만 계속 바닥에 닿아 있지 않도록 상태도 살펴야 한다. 무엇보다 제대로 마르기 전에 습기를 오래 머금으면 품질이 떨어지거나 곰팡이가 생길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상하거나 병든 고추는 처음부터 말릴 고추와 분리한다. 햇볕이 좋더라도 통풍이 되지 않으면 잘 마르지 않으므로 고추를 너무 겹쳐 놓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밤이 되면 이슬과 습기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 놓는다.
건조기를 사용하면 훨씬 편하겠지만, 햇볕과 바람에 고추가 조금씩 쪼글쪼글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시골살이에서만 느끼는 재미다. 마당에 펼쳐진 붉은 고추를 보고 있으면 한여름의 햇볕까지 함께 저장하는 기분이 든다.
잘 말린 고추는 겨울 김장과 한 해 밥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고추 말리기는 단순한 건조 작업이라기보다 여름에 거둔 것을 다음 계절로 넘겨주는 갈무리에 가깝다.
8월 고추밭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탄저병과 병든 열매
고추가 붉어지기 시작하면 반가운 마음만큼 걱정도 커진다. 8월에는 높은 기온과 습도, 비가 겹치면서 고추 열매에 이상이 없는지 자주 살펴야 한다.
특히 신경 쓰이는 것이 탄저병이다. 잘 익어 가던 열매에 움푹 들어간 병반이 생기고 점차 썩어 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하면 속이 상한다. 애써 키운 고추가 수확 직전에 상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농사에서 가장 아까운 순간 중 하나다.
내가 텃밭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이상한 열매를 발견하면 그대로 매달아 두지 않고 제거하는 것이다. 병든 열매를 밭 주변에 그냥 버려 두기보다는 건전한 열매와 분리해 처리하고, 포기 사이가 지나치게 우거졌다면 통풍 상태도 살핀다.
진딧물도 새순과 잎 뒷면을 중심으로 자주 확인한다. 벌레가 조금 보인다고 곧바로 무언가를 뿌리기보다는 어느 정도 발생했는지부터 살펴보는 편이다. 텃밭을 오래 가꾸다 보니 병해충은 생긴 뒤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것보다 일찍 발견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요즘은 고추를 따러 나갈 때 수확만 하지 않는다. 잎 뒷면도 한번 들여다보고, 열매에 반점은 없는지, 쓰러진 가지는 없는지를 함께 확인한다. 매일 몇 분의 관찰이 결국 수확할 고추를 지켜 주는 셈이다.
기다리는 것도 농사의 한 부분이었다
고추를 키우며 가장 많이 한 일은 어쩌면 기다리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초록 고추가 굵어지기를 기다리고, 다시 붉어지기를 기다렸다. 수확한 뒤에는 햇볕 아래에서 천천히 마르기를 또 기다린다.
그렇다고 텃밭의 기다림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아니다. 물이 필요한지 살피고, 쓰러진 가지를 묶고, 병든 열매를 골라내며 매일 조금씩 곁을 지켜야 한다. 그러고 나면 어느 날 아침, 어제까지 초록이었던 고추가 붉게 변해 있다.
예전에는 그 변화가 왜 이렇게 느린가 싶었다. 지금은 오히려 그 시간이 좋다. 내가 서두른다고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에도 가장 먼저 고추밭에 가 볼 생각이다. 오늘 초록이었던 고추 가운데 몇 개나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는지 살펴보고, 잘 익은 것은 따고, 말리고 있는 고추도 뒤집어 볼 것이다.
서두르지 않아도 계절은 제 할 일을 한다.
8월 고추밭에서 올해도 나는 그 단순한 사실을 다시 배우고 있다.